전시

1. <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amidst the living and the dead),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ACAM), 1월 16일. 

2.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 송은아트스페이스, 1월 23일.

3.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국립중앙박물관, 2월 18일.

4. 이강소, <풍래수면시>, 국립현대미술관(MMCA), 3월 1일.

5. 남다현, <국립현대폐차장>, 아뜰리에 아키, 3월 12일.

6. 김성환, <우아 아‘오 ‘이아 ‘오 이아 에 이아>(Ua a‘o ‘ia ‘o ia e ia), 서울시립미술관(SeMA), 3월 20일.

7. <사라지지 않는>, 갤러리 부연(婦椽), 3월 26일.

8. <6 Murals>, PCO(피코), 개관준비전, 4월 3일.

9. <잠시-묶음: 타로 이티티 아아 모이에하 에파아 리하하 도서관 개관전>(Temporary Binding: Taro ititi aa moieha ephaa lihaha

     Library Grand Opening), 수건과 화환, 4월 3일.

10. 강다은, <비로소>(始, Witnessing), 부피 서울(Boofy_Seoul), 4월 3일.

11. 김민훈, <깊게 얕은>(Deeply Superficial), 다이브서울(Dive_Seoul), 4월 3일.

12. 염지희,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Nocturama: Valentin’s Ax), 인천아트플랫폼, 2024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상, 4월 4일.

13. <스탄차>(Stanza), 인천아트플랫폼, 이슬비 기획자, 4월 4일.

14. <젖은 둥지, 흐르는 말, 남겨진 물>, 프로젝트 스페이스 코스모스, 4월 9일.

15.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SeMA AA), 4월 10일.

16. <미니버스, 오르트 구름, ㄷ떨: 안녕인사>, 아르코미술관, 인미공 폐관 전시 일환, 4월 24일.

17. <PAAI>(Pan Asian Art Initiative), 브와뜨(boîte), PAAI의 그간 연구 작업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안, 4월 29일.

18. <그런 공간>, 인사미술공간(IAS), 인미공 폐관 전시, 4월 29일.

19. <2025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스윙바이>,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5월 23일.

20. <PPP x PAPER(zine fest)>, 플라츠 2, 7월 12일.

21. <지역미술조명사업 Ⅱ: 비상>, 대전시립미술관(DMA), 7월 30일.

22. <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MMCA), 11월 6일.

23.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 소장품 상설전시, 11월 6일.

24.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시립미술관(SeMA),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11월 8일.

25. <한국근현대미술 Ⅰ>,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 소장품 상설전시, 12월 3일.

26. <한국근현대미술 Ⅱ>,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 소장품 상설전시, 12월 3일.

 

 

영화 & 시리즈

1.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쇼잉 업>(Showing Up, 2022), 1월 1일.

2. 켄 콰피스(Ken Kwapis),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He’s Just Not That Into You, 2009), 1월 6일.

3. 우디 앨런(Woody Allen),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 1월 13일.

4. 샬롯 웰스(Charlotte Wells), <애프터썬>(Aftersun, 2023), 1월 14일.

5. 우민호, <하얼빈>(2024), 1월 15일.

6. 권혁재, <검은 수녀들>(2025), 1월 27일.

7.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 <파장>(Wavelength, 1967), 2월 1일.

8. 봉준호, <기생충>(Parasite, 2019), 2월.

9. 줄리어스 오나(Julius Onah),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Brave New World, 2025), 2월 16일.

10. 브래디 코베(Brady Corbet),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5), 2월 26일.

11. 미켈레 플라치도(Michele Placido), <카라바조의 그림자>(Caravaggio’s Shadow, 2025), 2월 28일.

12. 봉준호, <미키 17>(Mickey 17, 2025), 3월 3일.

13. 메리 해론(Mary Harron),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 2000), 3월 13일.

14. 앤서니 루소(Anthony Russo) & 조 루소(Joe -), <일렉트릭 스테이트>(The Electric State, 2025), 3월 16일.

15. 닉 카사베츠(Nick Cassavetes), <노트북>(The Notebook, 2004), 3월 30일.

16. 데이빗 프랭클(David Frankel),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 4월 6일.

17. 김형주, <승부>(2025), 4월 7일.

18. 조셉 코신스키(Joseph Kosinski), <F1 더 무비>(F1, 2025), 8월 3일.

19. 소토자키 하루오(Sotozaki Haruo),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2025), 8월 25일.

20. 이사야마 하지메(Isayama Hajime), <진격의 거인> 전 시즌, 8월 26일.

21. 박찬욱, <어쩔수가없다>(2025), 9월 30일.

22.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2025), 10월 1일.

23. 박찬욱, <어쩔수가없다>(2025), 10월 12일.

24.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 2005), 10월 22일.

25. 쥬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베스트 오퍼>(The Best Offer, 2014), 10월 29일.

26.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2016),

       11월 5일.

27. 타일러 닐슨(Tyler Nilson) & 마이크 슈왈츠(Mike Schwartz), <피넛 버터 팔콘>(The Peanut Butter Falcon, 2021), 11월 19일.

28. 자레드 부시(Jared Bush), <주토피아 2>(Zootopia 2, 2025), 11월 26일.

 

 

연극 및 공연

1. 연극 <분장실 청소>, 예술공간 혜화, 7월 20일.

2. 오페라 <리골레토>, 예술의 전당, 10월 31일.

 

 

1.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변신, 시골의사》, 민음사, 1998.

2.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데미안》(Demian), 민음사, 2009.

3.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북해에서의 항해: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미술》(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현실문화, 2017.

4. 장원쉬안(Chang Wen-Hsuan), 《엑스포츠 온 페이퍼》(Xsport on Paper), 미디어버스, 2023.

5. 유지원, 《미술 사는 이야기: 신생공간이라는 사건과》, 마티, 2024.

6.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돌베개, 2023.

7. 마크 피셔(Mark Fisher),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픽, 2023.

8. 고동연, 《아트 컬렉터의 시대: 글로벌 미술시장의 역사와 지금》, 에스앤아이팩토리, 2025.

9. 그래프턴 태너(Grafton Tanner), 《포에버리즘》(Foreverism), 워크룸 프레스, 2024.

 

 

 

 

2024년에 이어 2025년에 본 것들 리스트를 올린다.

'2024년에 본 것들' 글을 보니 2025년에는 더 더양한 공간에서 전시를 보고,

20권 이상의 책을 읽고, 연극과 공연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다.

 

다양한 곳을 다니며 전시를 폭 넓게 보려고 한 목표는 성공이다.

인천에서 일을 하며 새로운 지역과 친해지고, 또 맡은 역할에 맞게 레퍼런스를 찾고자 움직였던 점이 도움이 되었다.

독서와 공연 장르 관람 목표는 터무니 없는 실패다.

실패는 다시 해보자는 의미로 받고, 한 가지라도 성공했음에 의미를 둬야겠다.

목표를 안 세웠다면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겠지.

(이루었더라도 내가 알지 못했겠지.)

 

2026년에도 전시와 책 관련 목표를 잡았고,

리스트를 적어내려가고 있다.

리스트를 보다 보면 빠르게 지나간 것만 같은 1년이 정말 다양한 모습과 소리로 채워져 나갔음을 느끼게 된다.

이미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바로 눈 앞에서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무엇보다 리스트는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지나간 시간의 단편이라도 지금에 와서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은

갈수록 퇴화하는 내 기억력이 아닌 그날그날 적어내려 갔던 기록과 사실의 리스트 덕분이다.

 

올해도 리스트를 작성할 것이고, 리스트는 또 다른 시공으로 채워질 것이다.

리스트에 미리 정해진 것은 없고  나도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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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턴 태너(Grafton Tanner), <포에버리즘>, 김괜저 옮김, 워크룸프레스, 발행: 2024. 06. 20.

 

 

 

현재라는 전능한 존재를 향한 찬양 속에서, 노스탤지어의 질병화는 여러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들을 더 공고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 계몽주의가 제시하는 진보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체득하지 못한 비순응자에게는 어김없이 퇴보의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 p. 14.

 

 

우리가 진보한 덕분에 노스탤지어가 질병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나, 노스탤지어의 격정적인 파괴성이 진보를 통해 정제되었다는 것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신화는 전진하는 진보 앞에 굴복하지 않을 후진성은 없으리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 p. 16.

 

 

과거 실증주의자들이 노스탤지어를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규정했다면, 기업들은 노스탤지어를 소비 가능한 제품으로 만들었고 광고업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돈벌이가 되는 상품인지 발견해 냈다. 적어도 이론상 소비자는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과거를 그리워할 만한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기업자본주의는 생산되는 상품을 통해 과거로의 귀환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문제를 키운 다음 해결책을 판매하는, 익히 입증된 자본주의 성공 방정식의 새로운 변주에 불과했다.

- p. 18.

 

 

진보라는 시체와 그것을 대신하는 과거라는 좀비

1850년대 진보 서사가 2020년에도 똑같은 효과를 갖지 않았다. (......)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곧 부서져 사라질 듯한 세상에서 현재의 충격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이 바로 미래이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시체를 회생시키려는 서툰 시도들은 계속되어 왔다. IT 기업들은 그들의 발명품(무인 자동차건 디지털 화폐건 가상현실 플랫폼이건 )을 진보 서사에 엮으며 다음 대약진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라고 자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수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 정신 나간 테크노크라트[과학기술 지배론자]가 아니고서야, 전기차가 백열전구만큼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 p. 20.

 

 

진보가 신뢰하기 힘든 신화로 전락함에 따라, 그 대신 노스탤지어적 반응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 과거를 과거로 내버려두지도 않으면서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거부할 수 있는 도구. 그 대신 과거를 재시동하는 도구. 과거를 현재 속에 계속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상실의 여지를 없애고 마침내 노스탤지어를 완전하게 정복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어떤 도구 말이다. (......) 노스탤지어를 상실했던 무언가가 마음속 또는 현실에 잠시 돌아왔을 때에 느껴지는 감정으로 정의한다면, 과거가 현재 속에 지속해서 존재하는 동시대의 현상은 '노스탤지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과거를 현재 속에 계속 두는 것에 대한 논의를 나는 '영원주의(foreverism)'라 부르려 한다.

- pp. 20-21.

 

 

영원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노스탤지어의 근절이다. 마치 그 옛날 법과 의학이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한층 더 교활한데, 소비와 선택이라는 환상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 이 논의에서 영원주의가 수반하는 일련의 과정을 '영원화(foreverizing)'라고 부르고자 한다.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 클라우드 아카이빙, 심지어 음성 복제 기술까지도 모두 영원화 사업의 일환이다. 풍화되고 고장 나고 사라진 것을 되살려 내어 현재 속에 영원히 살게끔 하는 모든 작업 말이다. 무언가를 영원화한다는 것은 단지 보존하거나 복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재 속에 되살려 미래에도 영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실된 것을 부활시켜 재시동하고, 썩어 가는 시체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것. (......) '추억'을 디지털화하는 것. (......) 우리는 그것을 '더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 pp. 21-22.

 

 

영원화 (사업)의 필수 요소 혹은 과정인 '영원한 대화', '영원한 베타테스트(Forever Beta)'를 촉발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

온라인상에서 개인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서로와 영원히 대화할 수도 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촉발한 "대화 혁명"은 "친구, 가족, 모르는 사람, 적, 그리고 (당연히) 브랜드까지 무수한 조합으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 대화할 수 있게 했다. (......) 영원히 추적 가능한 개인,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대화, 그리고 영원히 업데이트되는 제품은 (......)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자본주의적 이상이다.

- pp. 24-25.

 

 

이 책은 영원주의가 자본주의의 오랜 숙제였던 '노스탤지어를 진압함과 동시에 수익화하기'에 결정적인 해법을 제공함으로써 노스탤지어에 관한 과거의 실증주의 담론을 대체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원주의가 비록 옛날 실증주의자들이 주창한 징벌적 조치보다는 덜 혹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임무는 동일하다. 바로 자본주의 지시하의 노동(과거를 현재 속에 지속시키는 노동 자체도 포함하여)과 생산성을 위협하는 감정적 동요를 억제하는 것이다.

- p. 25-26.

 

 

영원주의와 지금주의(NOWISM)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같이 간다. 죽음이나 그 어떠한 단절도 없음에도 계속 새로 시작되는 기형적인 직선적 시간. 유령으로 출몰하는 제 3의 시간. 자본에 착취 당하는 죽음:

영원주의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건 고된 일이다. 영원히 존재하고, 업그레이드하고, 대화하며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 어떤 일에도 '끝'은 없기에, 아무것도 끝마칠 수 없는 정체된 기분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서 오는 멀미를 동시에 느끼며 살아야 한다. (......) 쉼 없이 개선하고 개발하고 갈아 넣고 몰아세우고 따라잡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끝이 없다.

- p. 55.

 

 

그러나 영원주의 사회에서는 개선이 반드시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현재성"의 유지를 위한 연속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원주의 사회가 연속성을 중시하는 것은 모든 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다. 소셜 미디어상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을 브랜딩하도록 유도되며,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대가로 좋아요와 팔로워, 파트너십, 스폰서 등을 얻는다. 셀프 브랜딩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행동의 자율성이 제약된 사람은 영원주의 사회 속 포로다.

- p. 55.

 

 

40년이 지난 후,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Again)라는 슬로건을 미 특허상표국에 등록했다. 이 슬로건은 금세 광고판이나 빨간 야구 모자, 티셔츠에 등장했고 소셜 미디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 노스탤지어가 정치적 도구로 재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현재를 되찾을 수 없이 상실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상실의 혐의를 특정 계층에 뒤집어씌워 온 과정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인물 중 한 명에 불과하다. 대통령 임기 동안 그는 이민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그리고 민주당 전체를 백인의 권력을 약화시킨 주범으로 지목했다. 트럼프에 의하면 가장 잃은 것이 많은 당사자는 백인 남성이었다. 그는 백인 남성들이 직업, 전통, 유산, 심지어 역사까지 상실했다며, 부당하게 빼앗긴 것을 되찾아 주겠노라고 맹세했다. (......) 과거를 상실된 대의로 규정하고,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이야말로 과거를 되살릴 수 있는 해결사라고 시사한 다음, 대중을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 pp. 75-78.

 

 

"불멸이란 다름 아닌 모든 시간에 편재하는 것이기에."

- p. 81.

 

 

현재의 여러 순간이 연이어 계속되는 지금주의든, 길게 늘어진 현재가 영원히 계속되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집어삼키는 영원주의든, 모든 것을 현재 속에 두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이라는 점은 같기 때문이다.

- p. 91.

 

 

노스탤지어는 오랫동안 사라졌던 것이 현재 속에 다시 나타날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영원주의는 이와 반대로 과거를 되살려 내어 다시는 죽지 않게 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자본주의영원한 현재 속에 영속시키고, 영원히 계속되는 지금을 약속한다. 이 영원한 순간 속에는 귀신조차 살 수 없다. 영원화된 공허 속에 산다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며, 감시하는 시선 아래 생산하고 경쟁하는 것이요, 봄이 다시 오기는 할지 궁금해하는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우주를 표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징벌적인 방식과 마찬가지로, 영원주의 역시 노스탤지어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

- pp. 92-9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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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이명이 시끄러워 잠 못 드는 밤 돌아보면 무엇도 보이지 않는데 누구의 메시지이기에 이렇게 다급한가 깊은 밤 날 불러 자리에 앉히고 전언은 끝내 해독되지 않는다*

 

아직 전달되지 못한 말들이 있다. 간밤에 선인장과 우주의 또 다른 생명체가 주고받았다는 은밀한 교신.** 그들의 이야기는 사막을 출렁이는 파문을 일으켰다지만 이명과 같은 잡음이 되어 우리에겐 도달하지 못하고, 전언은 끝내 해독되지 않는다. 이처럼 분명하게 감각할 수 없는, 그러나 어렴풋한 진동으로만 감지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감각의 불능이 존재의 부정이 될 수 없듯 감각의 경계 아래 침묵으로 감춰져 있는 이야기들이 미상의 비프음으로, 무명의 바이탈사인으로 어두운 정적을 뚫으며 자신을 전해온다. 《전/언들》은 경계에서 그 이야기를 상상한다. 만남과 갈라짐, 맞닿음과 어긋남이 동시에 일어나는 선이자 면인 경계. 그렇기에 경계는 고요할 수 없다. 매끄러워 보이는 일상의 표면은 사실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를 감추고 있으며 우리가 항상 다른 존재와 얽혀 맞닿아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결코 고요할 수 없는 경계는 자신의 갈라진 틈새로 문득 전해지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맞닿음

 

김미류는 경계란 맞닿는 면이기에 갈라져 있는 너와 내가 원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의 별밖에 없던 캄캄한 밤 어느 낯선 남쪽 지역의 땅을 밟아 나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은밀하게 교신하듯 발바닥으로 땅을 누르면 땅도 나의 발을 붙잡고 있는 듯한 감각. 땅과 발을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 물리학적 영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원리를 탐구하며 우주와 같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던 초기의 작업에서 땅의 표면을 닮아 촉각을 전달하는 지금의 작업으로 이행하게 한 것도 그때의 경험이었다. 우주에서 땅으로 내려온, 그러나 여전히 대지의 명백함 이면으로 우주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 〈우주와 땅에서 만나기〉(2025)는 그러한 작업일 것이다. 

 

우주와 땅. 우리는 그들의 중간자로 서있음에도 우주의 순행과 땅의 호흡을 쉽사리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감각할 수 없다는 불능감은 감각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불신은 다시 미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의 직관은 이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표면적 세계 너머로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의심과 상상 속에 김미류는 세계의 표피를 들춰 그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 

 

2023년부터 시작한 〈들뜸〉 시리즈와 2024년의 〈위와아래〉는 인간, 비인간 할 것 없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피부를 지닌다는 생각을 공유하며 〈스민 조각들〉 시리즈(2025)로 이어진다. 이 작업들은 들뜸의 사전적 의미처럼 단단한 지표에서 살갗이 벌어져 일어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맞닿는 면으로서의 경계라는 생각은 모든 존재의 원소로서의 피부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발과 지표 사이에서 은밀히 교신했던 경험, 그로부터 내가 땅을 밟고 있듯, 땅도 나를 밟고 있음을 느꼈다는 그의 말처럼 김미류에게 피부는 서로를 구별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얽혀있음을, 그러므로 어떠한 미상의 존재와도 우연하게 맞닿을 수 있음을 알리는 촉각적 면으로 존재하며 아직 전달되지 못한 전언의 단서로서 새로운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어긋남

 

작업이 실제 삶에 반영돼서 서로 일치했으면 좋겠어 문득 이 말 속에 경계에 대한 강수빈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경계란 간극을 두고 어긋나는 것들 곧 현상과 실재, 이미지와 진실, 눈에 보이는 피상과 보이지 않는 진상을 구별하고자 하는 인식론적 태도와 같다고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과 이를 편집적으로 반영하는 디지털이미지 사이의 괴리를 다루었던 초기 작업서부터 어긋나는 것들 사이에 경계를 짓는 방식은 작업의 저변에 있어왔다. 이후 고정된 형태와 관점을 통해서만 기록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자 반사체를 주요 매체로 다루기 시작했고, 구조물로 틀 지워진 〈MEDIA〉 시리즈(2022)와 그것들을 결합해 놓은 〈무제 #1~5〉(2022)를 거쳐 지금의 보다 유연하고 유동적인 반사체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은 매체를 실험하면서 경계를 짓는 태도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면서 어긋나는 것들을 구별하는 행위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변화하는 현실과 그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었던 것은 반사체를 더욱 잘게 조각내는 방식을 통해 어긋나는 경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작업에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단위의 삼각형들(Tris)이 매끄러운 표면을 이루고 있는 〈흐르는 장면들〉(2024)과 〈이미지의 기원〉(2025)은 찬란하게 부서지며 흐르는 강물의 허리를 잘라내어 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강물이 주변의 풍경을 난반사하듯 강수빈의 어긋난 반사체 역시 자잘한 굴곡들을 만들어내며 일상의 납작한 세계를 다르게 비춰낸다. 작가가 반사체로 반영해내고자 하는 대상인 생동하는 현재와 변화하는 현실에서 방점은 현재와 현실이 아닌 생동과 변화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강수빈의 반사체가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비추지 않고 마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관점대로 굴절시키고 어긋나는 풍경을 재조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현실의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라 경계 아래서 유동하는 현실의 실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사체의 단단하고 직선적인 느낌에서 탈피하여 천과 같이 유연하고 곡선적인 조형을 시도하는 것, 고정된 시점에서 벗어나 〈나그네의 발걸음〉(2025)에서 감지되는 이동성을 실험하는 것 모두 생동하는 현재와 유동하는 현실을 작업에 대응시키고자 함이며, 이는 일상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와 서사를 상상하게끔 만든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강수빈은 옅은 미소와 함께 자신의 삶의 태도를 담대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서 얼핏 반짝이며 흐르는 그의 작업이 겹쳐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작업과 실제 삶이 일치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대로 이미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 전해질

 

언젠간 전달되어야 할 말들이 있다. 선인장과 우주의 또 다른 생명체가 주고받았다는 간밤의 은밀한 교신과 같이, 감각의 경계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온전하게 도달하지 못하는, 그러나 만남의 웅얼거림이, 서로 맞닿고 어긋나며 울리는 진동이 아직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것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려온다. 《전/언들》은 경계에서 그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상해보길 제안한다. 맞닿고 동시에 어긋나는 경계를 응시하며, 그 틈새로 엿보이는 어두운 공백을 거슬러 메워보기를, 발밑으로 맞닿는 땅의 피부를 느끼고 살갗의 아래로 까맣게 감춰진 심연을 상상해보기를, 계속해서 어긋나는 자신의 관점과 풍경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의 흐름과 변화의 가능성으로 삼아 아직 전해지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 상상해보기를 제안한다. ‘아직’이라는 말은 ‘언젠가’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야기는 언젠가 도달할 것을 예견하며 언젠가는 전달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아직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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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종의 시 〈난해한 주파수〉에서 인용했다. 편의상 원작에 존재하는 행갈이 없이 옮겼다. 전시의 제목 역시 이 시를 참조했다.

** 〈난해한 주파수〉의 두 번째 연을 참조했다. ‘/’로 행을 구분하여 옮긴다. 

밤마다 / 선인장이 우주의 또 다른 식물과 / 교신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 그때마다 한 번씩 사막이 출렁였다는 게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데 / 이건 또 누구로부터의 호출이기에 이다지도 은밀한가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025. 08. 26. -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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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에 있어 QR코드와 디지털 자료가 실물 리플릿을 대체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지만, 반복되는 핸드폰 조작이 관람 리듬에 방해를 주며, 관람에 의욕적이지 않은 다수의 관객들에겐 더욱 관람 의지를 꺾는 요소라는 생각. 그나마 벽면 캡션이 나름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어 최소한의 몰입도를 조성함과 함께 관람 난도를 조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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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급 전시에 오면 언제나 정보량 범람이 문제. 작품 수도 많은데, 글도 많고, 동시대 미술의 다매체적 특성 상 다수의 영상 작업이 관람 시간을 증가시켜 전시피로감을 극대화한다. (특히 영성과 강령이라는 주제의 특성 상 영상 작업이 많았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획자의 의도가 주가 되는 전시 형식인데, 그 의도를 염두에 두고, 그에 견주며 관람할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런지 의문이 됐음.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괴리라는 지난한 문제를 더욱 부각하고 심화시키는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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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도 파악의 어려움과 관람 피로도가 이중으로 힘들게 하는 전시에서 개별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가령 힐마 아프 클린트 같은 유명 작가의 그림은 전체 주제 안에서 사유되지 못하고 탈맥락화되어 독립된 작품으로 보게 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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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미술사에서 벗어나는 영성 미술(?)에 대한 전시이지만, 역사를 개괄하는 전시는 아니고 새로운 인식 방법으로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서베이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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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 시작 부분에 전시된 조던 벨슨(Jordan Belson)의 <매혹>(Allures, 1961)과 <명상>(Meditation, 1971)은, 매혹과 명상이 영성에 빠져드는 두 방식이라는 점과 전시가 강령에 대한 전시라는 점에서, 전시의 입구에 배치했어도 좋았을 듯.(전시의 입구에 전시된 드로잉? 판화? 작품들이 전시 전체의 도입부로서 분위기 조성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전시했는지 의문이 들었음.) 물론 매혹과 명상은 외적 자극의 유무에서 굉장히 다른 몰입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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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산업화 사회와 AI, 자동화 기술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라는 두 가지 맥락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인간소외의 문제에 대하여 영적 실천과 '영혼의 기술(Technology of the Spirit)'이라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예술의 양상을 보여준다. 영혼의 기술이라는 개념은 홍콩 철학자 육후이(Yuk Hui)의 '코스모 테크닉스(cosmo-technics)'라는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 개념은 모든 문명이 고유한 우주론과 함께 고유한 기술론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과학기술이 아닌 다양한 지역, 역사, 정치적 배경에 따라 발명(견)되고 전승되어 온 기술로서, 그 자체로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성에 포섭되기 거부하는 기술을 말하며, 대표적으로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민속 신앙의 고유한 흐름들이 이러한 기술의 예시가 된다. 전시에서 말하는 영혼의 기술이란 이러한 영성을 통한 실천의 방식을 말하며, 이 기술은 모두 각자의 맥락에서 형성되어 개인의 무의식과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어 예술가의 작업에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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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기술과 함께 전시의 또 다른 축인 '강령(Séance)'는 예술가들이 영혼의 기술을 통해 지금 여기에 없는 것과 다시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국 전시는 근대 이후 기술 문명과 영적 실천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예술을 통해 영혼의 기술이 가진 해방과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주제에 맞게 챕터 구성이 잘 이루어져 후반부로 갈수록 전달이 명확해진다. '챕터 3 트랜스'까지 관객을 흔들어 놓더니 다음 챕터인 '실천적 우주론'에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치유와 해방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이후에는 영혼의 기술과 영적 실천이 뒷방으로 밀려 버린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제시하며 맥락을 읽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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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론의 도입부, 즉 '실천적 우주론'까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이었지만, 그 이후로 설득되어 버린 느낌.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들은 타마르 귀마래스와 카스페르 악호이(Tamar Guimaraes & Kasper Akhoi)의 <제르바시오 장군의 가족>(2013/2014)과 이번 비엔날레 커미션 작품이기도 한 히와 케이(Hiwa K)의 <당신은 무엇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You Won't Feel a Thing, 2025). 원래 리서치와 아카이브 기반으로 풀어내는 작품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들을 통해 전시에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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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이라크 북부의 쿠르디스탄에서 태어난 히와 케이는 25살에 독일로 이주하기 이전까지 동료 지식인, 시각예술가, 뮤지션, 무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유럽 문학과 철학에 대해 공부했다. 그의 조각, 비디오, 퍼포먼스는 친구와 가족에게서 들은 일화와 자신의 전기를 교묘하게 엮어낸다. 쿠르드계 이라크인이자 독일 이주민으로서 히와 케이는 개인적 기억을 통해 전쟁, 이주, 신자유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 같은 우리가 여전히 겪고 있는 글로벌 위기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는 비디오로 기록하며 종종 스스로를 작품 속에 드러내는데, 이 작업들은 단체 요리 수업, 음악 공연, 정치적 시위 같은 참여적 요소를 포함하거나, 이라크 철학자부터 베네치아 금속 주조 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과의 협업을 바탕으로 한다. 대부분 독학으로 작업해온 그의 다학제적 접근은 이라크에서의 동료 간 학습 경험은 물론 플라멩코 거장 파코 페냐(Paco Peña)에게서 받은 음악적 훈련에 기반하고 있다. 히와 케이의 작업은 경계적 공간, 자신이 속한다는 감각, 그리고 서구와 중동 문화 사이의 교류를 탐구한다. 그의 많은 작품은 미술 교육과 전문화 같은 제도적 시스템, 그리고 개인과 집단 사이의 긴장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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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당신은 무엇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는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서구 문화에 잠식되어 소외되는 토착 문화를 다루며 신자유주의 하에 새로운 식민주의의 양상을 보여준다. 어느 날 작가는 허리 아래쪽에서 통증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고, 개복 수술로만 제거할 수 있는 신장결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러나 가능하면 현대 의료 산업의 상업적 환경을 피하고 싶었던 작가는 지역의 전통 치료사를 찾아간다. 이러한 일화는 "전쟁에서의 침공처럼 쿠르디스탄에 유입된" 서구 의학의 기업적 이익 논리로 인해 선주민 지식과 전통 의료가 뒤로 밀리는 현실을 보여주며 이라크 전쟁 이후 진행됐던 의료와 건강의 사유화, 식민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벌하려 한다"는 말처럼 작가는 기술과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영혼의 기술과 영적 실천의 현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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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은 또한 1990년대 이후 비엔날레를 초국가적 메가-전시 모델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지배적인 주제소들, 즉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이질적이지만 서로 연결된 이념 또한 소환한다. 예술감독들에 따르면 미술사에서 주변화된 정신과 해방적 실천의 비서구적, 토착적 전통들은 "서구의 헤게모니가 근거한 '계몽적(enlightened)' 합리주의에 저항하며, 그러한 틀을 회피하거나 교란하는 동시대 문화적 실천의 형태들, 즉 반식민적, 여성주의적, 생태학적, 반자본주의적 형태들과 공명한다."" (<아트 인 컬처>, 2025. 12월호,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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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디어시티의 예술감독들 또한 오쿠이 엔위저의 카셀도쿠멘타11(2002) 이후 21세기 주요 비서구 비엔날레들이 추구했던 공통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즉 한편으로는 [1]동시대의 첨예한 전 지구적 논제들을 포용하면서도 [2]서구 미술사의 현대성 또는 아방가르드에서 배제된 비서구의 문화적, 예술적, 사회정치적 전통[3]다성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환대하려는 이상을 근현대미술에서의 영적 경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상연하고자 했다." (같은 책,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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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클에 따르면 "전시 큐레이팅과 영화 편집 사이에는 사물과 이미지의 선택, 병치, 조합이 의미를 낳는 방식에서 유사성이 있다." 이에 따라 이 전시는 한편으로는 종교, 농업, 도시 계획, 과학 소설, 컴퓨터 문화에 나타난 우주적 사유와 상상력을 표현하는 회화, 조각, 키네틱 설치, 아카이브 자료를,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영상 설치작품과 별도의 상영 프로그램을 포함했다. 말하자면 영화를 비롯한 무빙이미지와 2차원 또는 3차원 오브제의 디스플레이를 관객이 움직임과 정적 관람을 교차하며 몽타주할 수 있도록, (......) 전시의 도법(scenography)과 배치를 구상했다. 어둠은 영사와 디스플레이를 엮어주고 영화적 어둠과 우주적 무한의 분위기 모두를 조성하는 공통 조건이었다." (같은 책, pp. 120-121.)

(미완) 

 

‘어, 여기 멍이 들었네? 왜 그래?’ 그 말을 듣고 보니 어느새 팔뚝에 멍이 들어있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새겨진 옅은 보랏빛 자국은 자신이 언제,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가 내 몸에 닿았고 약간의 충격을 가했다는 과거의 사실 자체를 넌지시 알려줄 뿐이다. 색은 실체가 없기에 사물과 신체, 언어를 빌려 자신을 드러낸다. 붉은 노을. 파란 하늘. 보랏빛 어스름. 그리고 다른 몸을 빌려 말하기에 그 자체로 소리가 없는 색은 자신을 소란하지 않게, 단지 표면 위로 그 빛깔을 드리우며 스스로의 의미를 은밀하게 전할 뿐이다. 

 

이 글은 보라색이 담고 있는 여러 의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라색에 얽힌 장면과 기억들이 이어진다. 그것들은 설명하기 보다는 이미지를 그려보게 하는 단편들로서 보랏빛이 감도는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666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프리즘을 활용해 빛을 분해하는 실험을 진행한다. 그는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어둠 속으로 들여보낸 다음 유리 프리즘에 연달아 비춘다. 공기를 통과하던 빛은 프리즘의 유리를 만나면서 그 경계에서 굴절된다. 그리고 그 결과 한 줄기의 하얀색 광선이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연속된 색의 띠로 분해되어 나온다. 이처럼 경계에서는 서로 다른 둘 사이의 만남과 갈라짐이 동시에 일어난다. 공기와 유리, 하얀 빛과 무지개 빛. 만남과 갈라짐을 주관하는 선이자 면인 경계에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굴절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새로운 생성이 발생할 수 있다.

사실 백색광이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각각의 빛이 지닌 고유한 파동 때문이었다. 가장 크게 진동하는 빛은 가장 작게 굴절되어 빨강으로, 가장 약하게 진동하는 빛은 가장 크게 굴절되어 보라로, 띠의 양극단을 이루며 우리 눈앞에 등장한다. 이로써 우리는 백색광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 존재함을, 즉 햇빛과 백열등에서 나오는 하얀색(처럼 보이는) 가시광선은 사실 비가시적이었던 일곱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미지 출처 www.freeimages.com/kr/photo/isaac-newton-using-prism-to-break-white-light-into-spectrum-2428050

 

 

뉴턴의 분광실험은 분해한 데이터를 크기와 강도에 따라 연속적으로 재배치하는 스펙트럼(spectrum)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펙트럼은 ‘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pecere’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하면 ‘보이는 것’ 혹은 ‘나타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영어로 유령, 귀신 등을 뜻하는 ‘specter’의 어원이기도 하다. 뉴턴은 빛을 실험하며 보이던 것에 의문을 던지고 보이지 않던 것을 비춰 드러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새롭게 재단한 셈인데, 과학적 체계와 수학적 이성의 열망은 결국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빛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을까.

20세기 초, 스펙트럼을 통해 색을 표시하는 가장 체계적인 구조 중 하나가 앨버트 헨리 먼셀(Albert Henry Munsell)에 의해 설계된다. 먼셀의 색 체계라 불리는 이 구조는 색상(Hue), 명도(Value), 채도(Chroma)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3차원 공간의 좌표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 좌표 위에 10개의 주 색상, 그리고 색상별로 10단계씩 구분하여 얻은 총 100가지의 색상을 표기한다. 천장을 날아다니며 붙어 있는 파리를 보면서 좌표계를 고안해냈던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자신의 좌표 공간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필요치 않은 명징한 인식을 구하고자 했던 것처럼, 먼셀은 자신의 색 공간을 통해 모든 색들이 표기되는 완전한 가시성을 찾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먼셀의 색 체계에서 보라색은 5P 3/10로 표기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에 색을 부여하고 보이게 만든 것은 알파벳과 숫자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5P 3/10은 보라색을 한 곳에 박제할 뿐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결국 색에 보라라는 이름을 주었던 것은 파동이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의 운동성이 경계를 넘나들 때 보이지 않던 것은 색을 얻었다. 보라색의 파장은 380~450(nm)의 범위를 갖는다. 보라색은 가시광선 중에서 가장 짧은 파장으로 스펙트럼의 맨 아래 위치한다. 그리고 그 아래로, 그러니까 보라색 범주의 바깥으로는 자외선(紫外線, ultraviolet)이, 말 그대로 보라색(자색) 바깥의 광선이 보이지 않게 지나간다. 보라색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접해있는 경계의 색이다.

 

먼셀의 색 체계 (이미지 출처 www.britannica.com/science/Munsell-color-system)

 

 

 

낯선 것과 친숙한 것

 

어렸을 때 어렴풋이 보라매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던 적이 있다. 보라색 매인가? 근데 왜 갈색이지? 매 자체를 많이 본 적은 없지만 기억 상 보라색 매는 없었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보라매가 ‘보라+매’가 아닌가? 아니면 보라에 다른 뜻이 있나? 정도로 넘어갔었다. 

한글로 ‘보라’라는 단어의 어원을 추정하는 여러 낭설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몽골어 유래의 귀화어 설이다. 보라가 몽골에서 불에 그을린 듯한 갈색을 뜻하는 ‘보르(бор, bor)’에서 왔다는 말이다. 보라매는 태어난 지 1년이 안 된 참매의 새끼를 가리킨다. 성체 참매는 검거나 검회색빛인데 반해 아직 덜 자란 참매는 갈색을 띤다. 그러니까 보라매는 사실 갈매를 의미할 것이다. 이름 모를 다큐멘터리에서 본 듯한 장면이 있다. 주인의 팔에 앉아 있다가 신호와 함께 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을 가로질러 사냥감을 포착하는 날렵한 매의 형상. 그 형상이 보라매라는 이름과 더불어 그대로 수입되어 들어온 것일 테다.

보라매에 관한 최근의 기억도 있다. 2017년 포켓몬고(Pokemon GO)라는 가상현실게임이 대유행 했던 시절, 신대방동에 있는 보라매공원에 당시 잡기 어려웠던 피카츄가 많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설연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부모님의 한숨과 약간의 민망함을 뒤로 하고 누나와 함께 피카츄를 잡으러 갔던 보라매공원에는 다행히(?) 우리 말고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만을 들여다보며 걷고 있었고, 중간에 멈춰선 이들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뺑글뺑글 돌리며 희귀 포켓몬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설맞이 이벤트로 희귀 포켓몬이 많이 출몰했었다). 그렇게 한국 포켓몬의 성지가 되어버린 보라매공원은 최근 메타몽 가든을 조성하는 등 포켓몬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모양새이다.

 

메타몽 (이미지 출처 https://pokemon.fandom.com/ko/wiki/메타몽_(포켓몬))

 

포켓몬스터는 1996년 일본 닌텐도에서 발표한 게임시리즈이다. 이후 만화로 방영되면서 게임보이와 더불어 부모님의 맞벌이로 외로운 90년대 생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 역할을 자처했다. 컨셉은 간단하다. 플레이어가 포켓몬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볼로 포켓몬을 포획하고 다른 트레이너들과의 치열한 배틀을 거쳐 포켓몬마스터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물론 나는 포켓몬에 대해 우정과 같은 정서적 접근을 했기에 포켓몬마스터가 되는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외계의 몬스터를 주머니 속에 잡아넣고 친숙한 것으로 길들이는 재미는 쏠쏠했고, 그로써 나의 세계가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까지 확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알겠지만 포켓몬은 가장 귀여운 몬스터일 것이다. 그 이외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괴이한 짐승, 말 그대로 괴물(怪物)이다. 온갖 몬스터와 괴물을 포괄하는 용어인 크리처(creature)는 SF와 호러 장르의 영화, 문학의 주인공으로서, 또 다른 주인공인 인간과 대립하는 비인간 생명체로서 수없이 많이 등장해왔다. 이 같은 장르적 서사에 서스펜스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이 대립할 때 엄습하는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다. 저 낯선 존재와 마주함으로써 나의 세계가, 기존의 인식 체계가 파괴될 것만 같은 공포, 이것이 SF와 호러의 서사를 이끌어 왔던 주요 동력이었고, 멋있고 강력한 영웅적 인간이 나와 우리의 세계를 지켜내면서 끝나는 서사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쾌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낯선 것과의 조우가 낯익고 친숙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갑갑하고 재미없는 나와 우리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를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변화의 동력으로 장려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2024년 2월 춘천에서 짧은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집/밖>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던 전시를 통해 집에 바깥을, 친숙한 것에 낯선 것을 들여와 보고자 했고, 그 결과 집이, 친숙한 나의 것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서울에 거주하며 전시를 준비했기에 작가들과 동행하여 춘천을 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P 작가와 차에서 전시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춘천에 가는 길이었다. 작가는 전시 서문을 읽자마자 떠올랐다고, 혹시 읽어봤냐면서 한 권의 책을 알려줬다. 한국에서는 2019년 출판된 마크 피셔(Mark Fisher)의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the weird)과 으스스한 것(the eerie) 각각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해서 온전한 하나의 개념으로 세우고자 했다.

 

다만, 그 두 가지 유형을 분명히 구별하지는 못했고, 더구나 그들을 정의하는 요소들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주요한 문화적 사례들이 호러와 SF같은 주변적 장르에서 발견되며, 이런 장르적 유대 탓에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특유의 무엇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1]

 

마크 피셔에게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장르적 문법에 한정되지 않는다. 두 개념 모두 낯선 것, 외부의 힘과 맞닥뜨리는 것에서 촉발되는 정서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상존한다. (다만, 숨어서 혹은 감춰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충격적 감각과 ‘어째서? 왜?’를 묻게 되는 오류의 감각이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정의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낯선 것과의 만남에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태도다. 낯선 것은 기이하고, 으스스한, 꺼림칙한 느낌을 줄지언정 배척과 처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 느낌으로부터 돌이켜 나의 부족함과 불안정함, 나조차 모르게 내 안에 감춰져 있던 모습들을 깨닫게 하고 그로부터 나아가게 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낯선 것이 반드시 외계의 괴물인 것만은 아니다. 나와 우리 곁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괴물의 탈을 뒤집어 쓴 것처럼 무서워 보일 순 있지만, 낯선 것에서 오는 기이함과 으스스함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보는 자, 나와 우리에게 속하며 나와 우리가 돌이켜야 할 몫일 것이다.

 

 

 

 

 

 

 

 

 

[1]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서울: 구픽, 2019, 서문 중.

**2023년에 보고 썼던 두 개의 전시에 대한 리뷰

- 최상흠, <가설 건축물>, 스페이스 캔 & 오래된 집

- 권다예, <CHROMARIUM>, 챔버 1965

 

 

 

공명(共鳴)은 맞울림이라는 뜻을 지닌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공명을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조응’이라 정의하며 공명의 조건으로 상호 이질성을 내세운다. 최근 배경과 경력에 있어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 작가가 각기 개인전을 열었다. 최상흠은 스페이스 캔에서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 <가설 건축물>(8.24 ~ 9.27)을 가졌고, 권다예는 챔버 1965에서 열린 <CHROMARIUM>(9.13 ~ 9.27)을 통해 자신의 실험적인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서로 다른 두 작가만큼이나 그 형식과 방식 역시 많이 달랐음에도, 전시는 두 작가가 발 딛은 모종의 공통 지대가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곳은 회화라는 영역으로 그 안에서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함께 울리며’ 의미심장한 화음을 내고 있었다. 

 

 

1. 회화의 경계에서 유희하기

 

  매체에 따라 작가의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지금의 예술계에서 과연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그러한 구분을 가지고 가는 이유는 그것이 작가의 출발점을 지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작에서 볼 때 최상흠을 회화 작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상흠은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고향 대구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는 70-80년대 대구 미술계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러한 영향력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개념미술적 성격에서 나타난다. 그의 초기작부터 근래의 작품까지 집약한 <가설 건축물> 역시 <刀枷刀 匕箱刀(도가도 비상도)>(1994)라는 개념미술적 작품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와 동음이라는 점에서 착안해 언어적으로 유희하는 이 작품은 ‘언어로 표현되는 의미의 차원은 존재의 차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두 차원 사이에서 ‘유희’하는 작가의 태도는 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는 책을 활용한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 속 한 페이지에서 임의의 글자와 단어를 선택하고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책 연작은 언어의 덧없음을 제시하는 작가만의 풍자법이다. 이처럼 존재와 의미의 차원을 나누고 그 틈에서 유희하는 작가의 태도는 일견 단절된 듯 보이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스페이스 캔 본관과 그 부속 전시공간인 오래된 집에서 나뉘어 진행되었고, 오래된 집에서는 개념미술 경향의 과거 작품들이, 본관에서는 최근의 레진 몰탈 페인팅 작업들이 전시되었다. 이러한 전시 형식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오는 최상흠의 작품 세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두 시간 사이에 개념미술과 페인팅 작업으로 일별되는 어떠한 단절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작가의 세계관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작업의 두 형식 사이에서 드러나는 단절의 틈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획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물이 직접 말하게 해야 한다’는 그의 사유” 방식이 기저에서 두 작업 형식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최상흠에게 존재 차원에 자리하는 것은 ‘사물 혹은 물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 직접 자신의 존재를 말하게 하고자 함은 모더니즘의 순수 예술과 아방가르드적 반-예술 모두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순수 예술에서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로 대표되는 연역적 추상 회화를 그 예시로, 반-예술에서는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 칼 안드레가 보여주는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을 그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결국 ‘회화로의 환원 가능성’에 있다. 현대 미술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미니멀리즘 작품을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으로 개념화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반-예술의 물질주의 작품은 납작한 회화의 본성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한 채 자신의 매끈한 볼륨을 드러낸다.

 

 

 

 

레진 몰탈 페인팅으로 대변되는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Industry painting)’ 역시 회화성을 거부하고 회화로 환원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예술의 계통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최상흠은 모더니즘 회화를 이루는 순수 조형요소와 작가주의 모두를 거부하는데, 그 중심에는 레진 몰탈이라는 산업재료의 적극적인 활용이 있다. 그는 레진 몰탈을 물감 대신 활용하여 순수한 색의 관념을 파괴하고, 레진 몰탈의 퍼져나가는 성질을 이용해 작품에 우연성을 가미함으로써 작가주의를 벗어난다. 그리고 레진 몰탈을 붓고 퍼트리는 행위의 계속된 반복은 볼록하게 돌출된 면을 만들어 순수 회화의 평면성 내지 정면성마저 파괴한다. 그러나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분명 회화의 잔영을 교묘히 간직하고 있다. 회화의 환영은 그의 작품이 전면균질회화나 절대주의의 검은 사각형을 순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또 페인트칠과 회화를 동시에 의미하는 ‘painting’이라는 단어의 애매함 속에서 계속해서 출몰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회화와 회화의 겹쳐짐 역시 최상흠 특유의 ‘유희’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질의 존재를 드러내는 바깥의 표면은 결코 그 존재를 명확히 드러낼 수 없음에. 최상흠은 회화와 회화에 반하는 것 사이에서 유희하고 그 경계에 서서 관람객들이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만든다. ‘과연 이게 회화일까? 아닐까?’

 

 

 

 

2. 회화 안에서 경계 넓히기

 

  최상흠이 회화의 영역을 오가며 유희하는 유람객이라면, 권다예는 회화의 영역에 천착해 탐구하는 연구자와 같다. 권다예는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활동해온 신진 작가이다. <CHROMARIUM>은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으로, 권다예는 챔버 1965라는 목조 단층 건물의 전시 공간을 실험실과 같이 구성했다. 그 실험실의 이름은 ‘색-공간(chrom–arium)’으로 실험의 주제는 ‘회화성이란 무엇일까?’이다. 더 이상의 연구가 필요할까 싶은 회화 매체에 대해 권다예는 공부엔 끝이 없다는 듯, 질문하고 이에 답하는 과정을 지속하고 있다. 사실 권다예의 작업을 밖에서 보면 회화와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화학 실험실을 방문한 듯, 아크릴 판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결과물은 작품이라기보다는 곰팡이 혹은 세균들을 번식시키는 판처럼 보이며, 천장에서 관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지는 액체는 차라리 화학 용액처럼 느껴진다. 그 뿐이랴, 한쪽 구석에는 PVC 파이프들이 얼기설기 구조물을 이루고 있고 작가 스스로도 ‘종유석’이라 표현하는 석고체가 선반 위에 줄지어 서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찬찬히 실험(?)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이곳은 화학 실험실이 아니라 ‘회화 실험실’이라는 것을. 색을 섞고 형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권다예의 회화 실험은 ‘색’과 ‘그리는 행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회화의 본질’ 즉 회화성이 곧 색과 그리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어디든지 간에 색이 어떤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면 그것을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가의 입장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바닥에 거대한 캔버스를 깔아놓고 온몸을 붓으로 활용하여 물감을 흩뿌린다. 이것이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아닌가. 또 이번엔 종이 위에 색색의 물감을 흘려서 스며들게 한다. 이것이 헬렌 프랑켄탈러와 모리스 루이스의 스테인 페인팅이 아닌가. 그러나 권다예의 작품에서 ‘그리는 주체’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철판 위로 물감을 떨어뜨리고 그 물감을 순지 위에 흩뿌려내는 것은 중력과 시간에 의지한 색 그 자체이다. 시간과 중력의 도움으로 실행되는 색의 자동기술법은 작가를 삭제하고 회화의 순수한 무의식에 도달하려는 권다예만의 방식이다. 색의 자동기술법과 함께 작가는 직접 그림을 완성하는 창조자에서 퇴위하여 색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기구를 설계하는 보조자의 지위를 갖는다. 보조자로서의 작가가 설계해 낸 회화 기구, 권다예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작품을 ‘회화 설치’라 부른다. 회화 설치로 구현된 chromarium은 색의 공간이자 색이 스스로를 생산하여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색-공간이 된다.

 

 

 

 

 

색이 그려낸 결과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절대 순수’의 색인 ‘검은색’으로 발색된다. 공간에 상주해있던 작가에게 물었다. ‘왜 검은색인가요?’ 작가는 모든 색이 섞이면 검은색이 되는 현상에서 검은색을 우주와 같이 무한한 잠재성을 내포한 색이라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검은색을 농축해 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농축해 낸 검은색을 석고체의 바닥에 두면 검은색은 석고체에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표현한다. 검은색이 품고 있는 농축된 색채가 분해되면서 석고체에 총천연색의 무늬를 남기는 것이다. 여기서도 작가는 그저 보조자일 뿐이며, 주체는 검은색이다. 그렇다면 석고체 역시 하나의 회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색이 있고, 그리는 행위가 있으므로. 권다예의 작업에도 최상흠과 마찬가지로 창조자로서의 작가는 없으며 회화의 평면성 내지 정면성 역시 파괴된다. 그러나 최상흠과 달리 권다예의 작업을 회화 작업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가 색과 그리는 행위라는 ‘회화성’에 천착하여 실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의 가장 순수한 본질만을 추려내고 그것에서 출발하는 그는 회화의 영역 내부에서 그 경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이자 연구자이다. 권다예의 작업, 그것은 하나의 회화 작업이다!

 

 

3.

  

  이제는 회화가 예술계 첨단에서 유행을 선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회화를 그저 빛바랜 유물로 치부하고, 더 이상 어떠한 생명력도 갖지 못하는 메마른 샘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새롭게 열리는 수많은 전시는 여전히 회화 전시이거나 회화를 포함한 전시이다. 우리는 여전히 회화와 함께 하고 있고, 회화는 아직까지 예술가들에게 거대한 울림을 주고 있다. 다만, 그 울림을 어떠한 목소리로 표현할 것인가는 개별 예술가들의 문제이다. 누군가는 회화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회화를 계속된 탐구와 실험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회화와 함께하는 양태들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앞으로도 회화라는 대지는 마르지 않은 채 우리에게 다양한 자양분을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전시

1. 정지현, <Hangdog>, 조희현 기획, 아트선재센터, 1월 7일.

2. 타렉 아투이, <The Rain>, 김선정, 김지나 기획, 아트선재센터, 1월 7일.

3. 홍순명, <저기,(Over there,)>, CR Collective, 1월 13일.

4. 민찬욱, 태킴, 정찬민 등 6명,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4도씨>, 《논알고리즘 챌린지》 part 2와 3, 세화미술관, 2월 29일.

5. 정나영, 최연우, 남민오 등 7명, <무솔리니 팟캐스트>, 안재우 기획, 아마도예술공간, 제11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수상전, 3월 26일.

6. 갈라 포라스-킴, <국보>, 리움미술관, 3월 26일.

7. 시야디에(Xiyadie), 요린데 포그트(Jorinde Voigt), <Jorinde Voigt & Xiyadie 2.0>, P21, 3월 26일.

8.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호암미술관, 4월 20일.

9. 이배, 황인기, 안규철 등 6명, <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 & 김진, 서찬석, 신경철 등 10명(팀), <드로잉 페어링: 감각의 연결>, 소마미술관, 4월 30일.

10. 이다희, 호크마 김, 최기창 등 5명, <길을 찾는 순간 들리는>, KT&G 상상마당 춘천, 5월 2일.

 

11. 박민하, 송세진, 윤영빈 등 12명,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윤율리 기획, 일민미술관, 6월 16일.

12.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7월 21일.

13. MMCA 소장품 특별전, <가변하는 소장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7월 21일.

14. 강수빈, 권현빈, 장서영 등 7명, <사라졌다 나타나는>, 김선영 기획, 경기도미술관, 8월 25일.

15. 강수빈, <필드테스트: 움찔거리기>, 갤러리광명, 8월 25일.

16. 단체 기획전,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9월 15일.

17. 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 부산현대미술관, 한성1918, 부산근현대역사관, 10월 9~10일.

18.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국립현대미술관, 10월 20일.

19. 김창열, 권영우, <두 개의 숨>,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11월 21일.

20. 단체 기획전, <손이 따뜻한 예술가들: 그 온기를 이어가다>, 유동룡 미술관, 11월 21일.

 

21. 단체 기획전, <언두 플래닛>, 아트선재센터, 12월 10일.

22. 이끼바위쿠르르, <거꾸로 사는 돌>, 아트선재센터, 12월 10일.

23. 박정연, 김유자,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 합정지구, 12월 12일.

 

 

영화

1.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2023), 1월 1일.

2. 윤종석, <자백>(2022), 1월 20일.

3. 폴 킹, <웡카>(2024), 2월 27일.

4. 오시이 마모루, <공각기동대>(1995), 2월 28일.

5. 헤더 윌크, <크레센도>(2023), 2월 28일.

6. 장재현, <파묘>(2024), 3월 1일.

7. 장재현, <사바하>(2019), 3월 9일.

8.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 3월 28일.

9. 나홍진, <황해>(2010), 4월 8일.

10. 김성수, <서울의 봄>(2023), 5월 14일.

 

11. 조나단 글래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6월 15일.

12. 관후, <블랙 독>(2024), 10월 10일.

13. 존 추, <위키드>(2024), 11월 25일.

14.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타인의 삶>(2007), 12월 7일.

15. 코랄리 파르자, <더 서브스턴스>(2024), 12월 16일.

 

 

연극 및 공연

1. <2024 서울시향 신년 음악회>, 세종문화회관, 1월 5일.

2. <접변>, 대학로 TOM, 8월 27일.

3. <마지막 포에티카>, 실험무대702, 10월 27일.

4. <타인의 삶>, LG아트센터 마곡, 12월 5일.

5. <noBody>, 대학로예술극장, 12월 28일.

 

 

1.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픽, 2019.

2.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1952(2000).

3. 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카라칼, 2023.

4.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in 토마스 만 단편선, 민음사, 1998.

5. 서머싯 몸, <비>, in 서머싯 몸 단편선 1, 민음사, 2021.

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7. 프란츠 카프카, <변신>, in <변신, 시골의사>, 민음사, 1998.

8. 존 D. 카푸토, <포스트모던 시대의 철학과 신학>, CLC, 2016.

 

 

 

한 해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나름의 방법이 된 '본 것' 리스트.

 

이미 올해의 리스트도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2025년에는 더 많은 전시를, 더 다양한 공간에서 보고 싶다.

이제 막 기록하기 시작한 '연극 및 공연'도 더욱 열심히 보러 다니고 싶다.

이번 리스트에서 가장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은 '책'이다. 올해 목표로 세운 20권, 이것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목표를 잡아 보았고, 무리하지 않은 만큼 꼭 이루고 싶다.

 

새로운 한 해를 앞두고서는 항상 이렇게 하고 싶다는 말과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두서 없이 나열된다.

이러한 바람들이 결실없이 공연해지지 않도록 올 한 해도 잘 보내고 싶다.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삼환 외 옮김, 민음사, 1998.

 

 

 

 

인간적인 것을 연기해 내고 그것과 더불어 놀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멋있게 표현할 수 있으려면, 또는 그렇게 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싶으면, 우리 예술가들 자신은 그 무엇인가 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과 이상하게도 동떨어지고 무관한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양식과 형식, 그리고 표현을 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처럼 냉담하고도 꾀까다로운 관계를, 말하자면 그 어떤 인간적 빈곤화와 황폐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 나는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가끔 죽도록 피곤하단 말입니다. 예술가가 도대체 남자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자'한테 물어봐야겠지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들 예술가들이란 모두들 약간은 교황청의 저 거세된 성가대원들의 운명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들은 아주 감동적으로 노래를 합니다.

- pp. 45-46.

 

 

 

그런데 이런 냉혹하고도 허영심에 찬 사기꾼을 진정으로 편드시려는 겁니까? 한번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처리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온 세계가 말로 표현되었으면 그것으로 세계가 처리된 것이고 구원된 것이며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 글쟁이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고 '처리되었다' 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법 없이 계속 삶을 영위해 갈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보십시오, 문학을 통한 온갖 구원에도 불구하고 삶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계속 죄악을 범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정신의 눈에는 모든 행동이 죄악으로 보일 테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 그러나 제발 부탁입니다만,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문학이라고 간주하지 말아주십시오. (......) 그렇습니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으로서, 우리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나타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이며, 그것이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리자베타,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 pp. 54-55.

 

 

 

그래서 그는 그 티없이 맑고 순수한 자기 사랑의 불꽃이 재가 되어 발갛게 타고 있는 제단 주위를 조심스럽게 빙빙 돌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니고자 했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 불꽃을 북돋우며 불씨를 살리려고 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슨 야단스런 조짐이나 시끄러운 소리도 없이 그 불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져버렸다.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는, 변치 않는 마음이란 이 지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환멸감에 가득 찬 채, 그 불 꺼진 제단 앞에 아직도 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양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자기 갈 길을 갔다.

- p. 34.

 

 

 

그는, 약간 태만하고도 어슬렁거리는 태도로 혼자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서 먼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갔다. 그런데도, 만약 그가 길을 잘못 갔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 애당초에 없기 때문이었다.

- p. 34.

 

 

 

이런 식으로 여러 날이 흘러갔다. 그는 딱히 며칠이 흘러갔는지 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던 중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날이 찾아왔다. 그 사건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고 사람들도 주위에 있을 동안에 일어났으며, 토니오 크뢰거는 거기에 대해서 결코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 p. 89.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 나는 위대하고도 마성적인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자들에게 경탄을 불금합니다. 그러나 난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 문사(文士)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허깨비들의 우글거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생동하는 맑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 pp. 106-10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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