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다른 하나, 그 사이에 손끝
- <아니말, 그들이 왕이었을 때>, 보안1942(통의동 보안여관), 2023. 10. 20 ~ 11. 12.
저는 트래비스를 게처럼 걷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 저는 서투르게, 옆으로 또 뒤로 걷는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그건 당신이 게를 흉내 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미지가 당신에게 협업해야 할 무언가를 주는 것이죠. 그건 당신이 다른 종류의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갈라진 나무줄기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다. 마치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자태로. 자신을 찍는 사진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날아갈 태세이다. 전명은은 “새를 닮은 사람과 그가 숨겨놓은 또 다른 새”를 찍어 놓은 모양이다.** 그 새의 이름은 ‘권은혜’이다. 권은혜는 배우이기도 하다. 권은혜는 새를 연기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배우의 연기란 그 대상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이 모두 스스로의 규정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사진에 담긴 '청록색의 은혜-새(Turquoisebird)'는 더 이상 권은혜도, 그 어떤 새도 아니다. 차라리 다른 것이 ‘되는 중’인 새 혹은 권은혜이다.
최근 조각가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감각의 끝이 닿는 곳에 있는 건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가의 기관은 눈이 아니라 손가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사진가의 손가락은 곧바로 또 다른 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아닐까?***
전명은의 사진이 어떤 독특한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면, 그곳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사이지점일 것이다. 그 지점은 권은혜와 새처럼 다른 두 개체 사이가 될 수도 있지만, 하나의 조각, 식물, 겨울이라는 계절을 이루고 있는 시간의 면과 면 사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코 눈에 현상되지 않는 중간점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전명은은 그렇게도 오랜 시간을 들여,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피사체의 삶과 접촉하는 것이다.
*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가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자신이 분한 트래비스 비클의 극중 행 동 방식을 고민하면서 했던 인터뷰. [성기현. (2017). 「들뢰즈의 감각론 연구」. 철학박사학위논문. 서 울: 서울대학교 대학원. p. 106]에서 재인용.
** 2023년 10월 20일부터 11월 12일까지 ‘보안1942’에서 열린 <아니말, 그들이 왕이었을 때> 전에 작 품 소개글로 전시된 전명은의 작가노트에서 발췌.
*** 전명은, <작가노트>, 2018, http://chuneun.com/?page_id=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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