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삼환 외 옮김, 민음사, 1998.
인간적인 것을 연기해 내고 그것과 더불어 놀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멋있게 표현할 수 있으려면, 또는 그렇게 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싶으면, 우리 예술가들 자신은 그 무엇인가 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과 이상하게도 동떨어지고 무관한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양식과 형식, 그리고 표현을 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처럼 냉담하고도 꾀까다로운 관계를, 말하자면 그 어떤 인간적 빈곤화와 황폐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 나는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가끔 죽도록 피곤하단 말입니다. 예술가가 도대체 남자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자'한테 물어봐야겠지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들 예술가들이란 모두들 약간은 교황청의 저 거세된 성가대원들의 운명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들은 아주 감동적으로 노래를 합니다.
- pp. 45-46.
그런데 이런 냉혹하고도 허영심에 찬 사기꾼을 진정으로 편드시려는 겁니까? 한번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처리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온 세계가 말로 표현되었으면 그것으로 세계가 처리된 것이고 구원된 것이며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 글쟁이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고 '처리되었다' 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법 없이 계속 삶을 영위해 갈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보십시오, 문학을 통한 온갖 구원에도 불구하고 삶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계속 죄악을 범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정신의 눈에는 모든 행동이 죄악으로 보일 테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 그러나 제발 부탁입니다만,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문학이라고 간주하지 말아주십시오. (......) 그렇습니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으로서, 우리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나타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이며, 그것이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리자베타,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 pp. 54-55.
그래서 그는 그 티없이 맑고 순수한 자기 사랑의 불꽃이 재가 되어 발갛게 타고 있는 제단 주위를 조심스럽게 빙빙 돌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니고자 했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 불꽃을 북돋우며 불씨를 살리려고 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슨 야단스런 조짐이나 시끄러운 소리도 없이 그 불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져버렸다.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는, 변치 않는 마음이란 이 지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환멸감에 가득 찬 채, 그 불 꺼진 제단 앞에 아직도 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양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자기 갈 길을 갔다.
- p. 34.
그는, 약간 태만하고도 어슬렁거리는 태도로 혼자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서 먼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갔다. 그런데도, 만약 그가 길을 잘못 갔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 애당초에 없기 때문이었다.
- p. 34.
이런 식으로 여러 날이 흘러갔다. 그는 딱히 며칠이 흘러갔는지 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던 중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날이 찾아왔다. 그 사건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고 사람들도 주위에 있을 동안에 일어났으며, 토니오 크뢰거는 거기에 대해서 결코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 p. 89.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 나는 위대하고도 마성적인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자들에게 경탄을 불금합니다. 그러나 난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 문사(文士)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허깨비들의 우글거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생동하는 맑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 pp. 106-10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