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올 한 해가 삼 분의 일이 지났다는 핸드폰의 친절한 알림을 봤다. 어떤 어플에서 알려줬던 것인지, 아니면 핸드폰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기능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친절함 덕분에 나는 또다시 2023년의 첫 5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2016년 군 전역 이후 삶이 갈수록 힘들어져 왔다고 생각했다. 1년, 1년 차곡차곡 성실하게 시간의 선분이 길어질수록 그 끝에 서 있는 나는, 아니 그 첨단에 서 있게 '되어버린' 나는 참 성실하게도 힘들어왔다(지금은 바뀌었지만 20살 때 처음 검사했던 MBTI가 ISTJ였다. 선생님이 나보고 성실한 개미라고 했다. 이런 걸 보면 MBTI가 꽤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당시 나는 성실한 개미를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그리고 '힘듦'의 상승 곡선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하락세가 없으니 곡선이 아니라 직선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올해 첫 5개월은 심신 양면에서 골고루 힘들었다. 개인사의 세세한 항목들을 모두 열거하고 싶지는 않으나 현실과 처음으로 마주했다고 이번 5개월을 정의할 수 있겠다. 이처럼 현실과 더불어 삶이 급박하게 움직였고, 그 안에서 부족함과 무지함을 느꼈고, 새로운 긍정과 희망을 애써 품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일들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이유를 생각해봤다. 무엇이 나를 아무것도 안 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라고 할 때 이 문장의 주어는 숨어있다. 그래서 볼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 하나의 명증한 사실은 저 문장에서 '나'는 수동태라는 것. 나는 무언가에 의해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 5개월, 아니면 비슷한 양상으로 대학원을 수료한 지 3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었던 포인트는 결코 이름할 수 없는 '무언가'에 있는 듯하다. 스피노자(B. Spinoza)의 말대로 존재가 행위하는 힘이라면, 내 존재는 뭔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의해 꽤나 오랫동안 부정 당해 온 것이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이래서 코기토를 말할 수밖에 없었나 싶다). 미지의 무언가에 의한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먼저 규정하고 정의내려야 했다. 그래야 그 범위를 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을 '결과 내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결실을 내지 못하고 방점을 찍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나날들은 게으름으로 치부되었고, 표적에 명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지나온 궤적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논문의 완성, 졸업, 취직, 결혼...... 인생의 단계마다 있는 마침표들이 거대하고 둔중한 솥뚜껑 같은 것이 되어 나의 하늘을 가리고, 내게 보다 강력한 여분의 중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침표가 연속된다면, 마침을 위한 점을 찍고 또 찍어도 끝이 없다면 그게 마침표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침표의 과잉 뒤로 남는 것은 끝없는 결핍의 순환이 아닐까. 내가 점을 찍는다면 마침표가 아니라 '말 줄임표'를 찍고 싶다. 끝없는 말 줄임표의 연속으로 끝마침을 뒤로 미루고 미뤄 결과를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취하고 싶다. 지난 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던(막을 내리는 날짜를 착각하여 결국 가지 못했다...) 김윤신 작가는 '완전한 결론이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술에 완성이란 없다'고 말하면서 '예술은 삶'이라고 말한다.[1] 이는 질 들뢰즈(Gille Deleuze)가 예술을 '완성'이 아닌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삶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과 상통한다. 예술을 빼더라도 삶은 과정이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수동태로서 꽤나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분량을 떠나서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작은 결과를 내는 일이다. 이는 마침표라 할 수 없는 시시한 일이기 때문에 과정 속에 취해지는 점들이라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는 이유가 나와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 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나의 글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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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윤신.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작가 인터뷰 영상. 서울시립미술관. 2023. 

URL: https://www.youtube.com/watch?v=kcldz3pYG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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