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야만의 꿈들: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양미래 옮김, 반비, 2022.
**책 읽는 중. 문장은 계속 늘어남.
관념(idea)는 활동가(activist)와 유사하다. 관념은 그림자와 변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그다음에는 조롱을 당하거나 욕지거리를 들으며, 그다음에는 모두가 줄곧 알고 있었거나 믿고 있었던 무언가가 된다. 그 관념이 어떻게 제기되었는지, 누가 그 관념에 코웃음을 쳤는지는 잊힌다. (......) 가장 중대한 변화는 대부분 관점의 변화다. 누가 어떤 관념을 이끌어냈는지, 언제 그런 관념이 자리 잡았는지에 관한 관점의 변화는 점진적이면서도 흔히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런 변화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뀐다.
- 2024. 06. 24. p. 21
내게 희망이란 낙관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낙관주의는 비관주의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예측 가능하고 개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내게 희망이란 미래의 인지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미래에 나타날 결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결과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감각이다. 어쩌면 희망이란 나만의 불확실성 원칙일지도 모른다. (......) 말하자면 희망은 이 세상의 야생성, 예측 불가능성을 옹호하는 태도였다.
- 2024. 06. 24. pp. 23-24
아나키즘이란 질서가 아닌 위계가 없는 상태, 직접적인 절대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아나키스트들이 지적하듯 투표 민주주의는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수 있게 할 뿐이지 반드시 참여적이거나 직접적이지는 않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사람이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그저 다수만이 아니라) 모두가 실현 가능한 결정을 내릴 때까지 협상 과정을 지속한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아나키즘이란,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 미국인이 상상하는 대혼란이 아니라 괴로울 정도로 끝나지 않는 회의를 의미한다.
- 2024. 09. 18. pp. 44-45
나는 추상성과 구체성을 다루는 데 애를 먹는 사람이다. 추상적으로 보면, 우리는 1846년 콩코드에서 소로가 취한 태도, 1946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재판, 수많은 장소와 시대에 쇼쇼니족과 평화주의자들이 행한 저항과 맥을 같이하는 몸짓을 취하면서 평화와 정의라는 명목하에 시민 불복종을 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관목 속을 더듬거리면서 우리를 완전히 실성한 사람으로 간주한 요원 무리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내 신념은 늘 그 사이에서 흔들렸다. 요원들을 직업 선택범위가 제한적인 저학력 백인 노동자가 아니라 미국 군사 정책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 내게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어려웠던 일은 이 모든 것의 보이지 않는 배경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를 결박한 플라스틱 수갑, 내 짝궁의 신발 속에서 부러진 가시, 헬리콥터가 후두두 흩뿌리는 자갈과 위장한 모습으로 평화주의자들을 추격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들, 폭삭 무너질 듯한 평화캠프와 직접행동 따위의 모든 것 뒤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배경,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을 그 배경, 국제적 전쟁에 대한 대비 및 40주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국지적 핵전쟁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대규모의 핵무기 폭발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 2024. 10. 29. pp. 56-57
성지(聖地)를 통과하며 지구를 횡단하는 에너지의 맥에 관한 '지맥선'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을 개발한 사람들은 직선을 따라 배열된 중요한 장소들을 보여주면서 지맥선을 설명한다. 나는 이 지맥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지만, 수렴선(lines of convergence)은 믿는다. (......) 수렴선은 이를테면 한 위치에서 합쳐지는 전기(傳記)와 역사와 생태의 선이다. 핵물리학의 역사, 군비경쟁, 반공주의, 시민 불복종,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권리를 둘러싼 투쟁, 환경 운동, 그리고 유대-기독교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듯한 사막을 향한 신비주의와 광적인 믿음 등이 전부 하나로 합쳐져 네바다 핵실험장을 단지 자연지리학이 아닌 문화지리학의 일부로, 단순히 구체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추상적이기도 한 장소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무언가가 수렴하는 장소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역사들을 맞붙이며, 그로써 역사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우리의 개인적 역사와 공공의 역사와 이야기들 속에서 새로운 연결고리를, 심지어는 충돌까지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로 엮인 거미줄은 어디에서든 멀리 뻗어나간다. 그러나 그 가닥 가닥을 따라가는 일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 2024. 10. 29. p. 57
도보 여행자와 탐험가들은 대체로 희한한 습관을 갖고 있다. 자신이 이 작은 땅덩어리에 최초로 발을 내디딘 사람인지 아닌지를 추측해보는 것이다. 순결한 미개척지를 향한 미국인의 집착에서 비롯한 이 추측은 그 자체로 상당히 문제적이다. 무언가가 완전히 새로운 것일 가능성과 그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경험일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식의 추측은 보통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북미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발이 닿지 않은 장소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누군가가 등산 장비를 챙겨 말 그대로 그 어떤 인간도 가닿은 적 없는 봉우리에 오른다 해도 그가 거기서 취하는 몸짓의 의미와 동기는 다른 인간들이 취한 몸짓의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 정상에 오르는 최초의 인간이 되고 그 어떤 인간도 가닿은 적 없는 장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다 해도, 그건 클래런스 킹(Clarence King)과 존 뮤어(John Muir)와 그들의 뒤를 잇는 위대한 등산가들이 밟았던 문화적 영토를 그대로 되밟는 것과 다름없다. (......) 새로운 장소든 오래된 장소든 내가 있는 장소를 이해하려면 내가 떠나온 장소를 알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완전한 의미의 기억상실증을 가진 사람만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역사와 욕망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 때로는 그냥 앉아서 짐을 풀어보는 것이 좋다.
- 2024. 10. 29. pp.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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