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부허(Heidi Bucher, 1926~1993)의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전이 6월 25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됐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하이디 부허가 작고한 다음 개최된 작가의 회고전 및 개인전은 2004년 취리히 미그로스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하이디 부허: 자개(Heidi Bucher: Mother of Pearl)>전시를 시작으로 2022년까지 20번 가량의 크고 작은 전시가 진행되었고, 이번 전시를 제외한 마지막 회고전은 2021년 독일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시작해서 2022년 스위스 쿤스트뮤지엄 베른과 스위스 수쉬 미술관을 순회한 <변신(Metamorphoses)>전이다. 이처럼 작가는 2000년대 이후에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하이디 부허 재단(The Estate of Heidi Bucher)의 운영자이자 그녀의 아들인 메이요 부허(Mayo Bucher)는 "과거 유럽은 쇼비니즘과 남성주의적 시선에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고 앞으로 계속 바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하이디 부허의 작품이 재발견된 건 여러분 덕분"이라고 평했다.*
1.
이번 전시에는 1940~50년대의 초기 작품부터 80년대 후반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총 13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조각과 설치, 드로잉, 실크 콜라주, 영상, 다큐멘터리 등이 전시됐다. 퍼포먼스나 작품 제작의 기록용으로 활용한 영상과 다큐멘터리를 제외한다면 하이디 부허가 다룬 주요 매체는 조각과 설치, 드로잉, 그리고 실크 콜라주라고 할 수 있겠다. 연대순으로 따져보면 40~50년대에는 실크 콜라주와 드로잉 작업이 주를 이룬다. 이는 작가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에서 패션과 섬유를 전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작품을 보면 옷을 제작하기보다는 색채 실험, 직물 콜라주 등 조형적이고 매체적인 실험 작업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녀와 활발히 교류했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녀를 취리히 학교에서 가르쳤던 사람은 다다이스트 였던 소피 테우버-아르프(마찬가지로 다다이스트인 한스 아르프[Hans Arp, 1887~1966]의 아내이기도 하다)의 제자인 엘시 지오크였고, 무엇보다 전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1888~1967)이 당시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색채 이론과 커리큘럼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작가는 다다이즘의 전문가이자 컬렉터였던 한스 볼리제와 절친한 관계였다고도 한다.
2.
70년대로 들어서면서 하이디 부허는 '바디랩핑(Body Wrappings)'과 '바디쉘(Bodyshells)' 그리고 '소프트 오브젝트(Soft Objects)' 작품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계열의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미국 거주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그녀는 남편이자 현대 미술 작가였던 칼 부허와 두 아들과 함께 7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된다. 거기서 그녀는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 )가 미리엄 샤피로와 함께 제작한 기념비적 설치 작업인 <여성의 집(Womanhouse)>(1972)을 관람하는 등 여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신체를 둘러싸는 '바디랩핑' 작업이나 보다 완전한 수트 혹은 갑옷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디쉘' 작업은 마치 곤충의 외피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이는 자신의 몸을 둘러싼 보호막이자 해방을 위해 벗어던지고 나아가야 할 껍데기라는 은유를 지닌다. 특히 바디쉘 작업은 칼 부허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Landings to Wear'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협업은 칼의 'Landings' 조각을 바디수트로 활용하는 '입을 수 있는 조각(wearable sculptures)' 작업이었다. 1973년 취리히로 돌아오면서 하이디 부허는 부부로서의 가치관 차이로 칼과 이혼하게 된다. 그녀는 부허라는 성은 유지하지만 예술가로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 칼과 거리를 두게 된다. 취리히로 돌아온 다음 그녀는 오래된 정육점을 빌려 작업실로 사용한다. 그리고 작업실 중앙에 있던 냉동창고를 'Borg'라 이름하는데, 독일어로 'Ge-Borg-enheit'는 '안전'을 뜻한다고 한다. 누군가의 아내 혹은 엄마로서가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후 'Borg'는 1976년 그녀의 첫 '스키닝(skinnings)' 작업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Borg에서 작가는 '소프트 오브젝트' 작업을 시작한다. 앞치마, 스타킹, 속옷 등 여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액상 라텍스에 담근 후 방부처리하여 부드러운 조각을 만들어냈다. 라텍스에 절여진 오브제들은 본래의 용도와 색조를 잃게 되며 마치 곤충의 허물과 같은 형상을 지니게 된다. 변태(metamorphosis)를 마친 그녀가 빠져나간 듯 허물어진 오브제들은 중성화되어 영원한 기념비로 남는다.
3.
작가는 70년대 후반부터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업인 '스키닝(skinnings)'을 시작한다. 스키닝은 벽에 부레풀을 거즈와 함께 바르고 액상 라텍스를 덮어 말린 뒤 벗겨내는 기법이다.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 정신 의학자 빈스방거의 진료실 등을 방문하여 그곳의 피부를 벗겨낸다. 그곳에 쌓여있던 억압적 이념과 차별적 관습의 때를 벗겨내는 것이다. 피부는 몸과 외부가 교류하는 1차적인 장소이다. 우리는 피부를 통해 사회를 감각하고 시대를 경험한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지남에 따라 피부 위에는 겹겹의 지층이 쌓인다. 하이디 부허는 특정 장소의 피부를 벗겨내며 그곳에 쌓여온 시간과 역사를 벗겨낸다. 억압적 때가 벗겨진 공간은 중성화되며 작가는 그 피부를 전리품으로 챙긴다.
4.
말년에 이르러서 하이디 부허는 흘러넘치는 생명력과 끊임없는 변화의 상징으로 물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생애를 가로지르며 물과 같이 흐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보다 경쾌하게 흐르기 위해선 가벼워져야 하고, 가벼워지기 위해선 자신에게 무겁게 붙어 있는 무언가를 벗겨내야 한다. '생성을 위한 분리', '벗겨내고 벗어남'은 그녀가 가볍게 흐르기 위한 탈피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소개하는 글에는 항상 '아방가르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방가르드의 수호자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아방가르드의 가장 참되고도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혼란과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문화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 말한다.** 하이디 부허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당대의 억압적 이념과 폭력적 관습의 한 가운데에서 계속 흐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녀는 흐르고자 했고 흐르면서 사회를 움직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그 누구보다 전위적이다.
(글의 내용과 사진의 출처는 하이디부허 재단 https://heidibucher.com/biography/.)
* '가부장적 공간을 깨부수다...하이디 부허 회고전', 노컷뉴스, 2023.03.27일자 기사, https://www.nocutnews.co.kr/news/5916881
** 클레멘트 그린버그. ≪예술과 문화≫. 조주연 옮김(2004). 경성대학교 출판부
'쓴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얀 윌리엄스에 대한 메모 (0) | 2023.11.26 |
---|---|
<유근택: 반영>에 대한 단편 (0) | 2023.11.06 |
MMCA <올해의 작가상 2023>의 단편에 대한 단편: 이강승 (0) | 2023.11.03 |
에드워드 호퍼: 사실과 구상, 그 사이에서 (0) | 2023.05.24 |
3년 동안 아무것도 안한 것이 '돼버린' 수동태의 첫 글 (1) | 202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