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2023년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진행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해외소장품 걸작전’의 일환으로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공동 기획된 이번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회고전 성격을 띠며,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회화, 드로잉, 판화, 아카이브 등을 포함하여 총 270여점의 작품이 본관 3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이나 <철길 옆 호텔(Hotel by A Railroad)>(1952) 등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작품들이 오지 못 했지만(아마 휘트니 미술관의 소장품전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습작과 초기작들을 비롯해 <밤의 창문(Night Windows)>(1928), <자화상>(1925-30), <철길의 석양(Railroad Sunset)>(1929), <이층에 내리는 햇빛(Second Story Sunlight)>(1960) 등 다른 유명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무대로는 그 양과 질에서 잘 꾸려졌다. 무엇보다 작가 특유의 문학적인 심리 표현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전성기 뉴욕시절의 그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던 삽화가, 판화가로서의 이력들, 그리고 아내이자 파트너인 조세핀의 존재 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호퍼를 재조명하고 국내에 소개하는 자리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 <밤의 그림자>(1921). 에칭.&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왼쪽부터) 에드워드 호퍼. <노드 언씬 서스펜더의 '네글리제 셔츠 아래, 그리고 언더셔츠 위에 착용'을 위한 삽화>(1917-1920). 종이에 투명, 불투명 수채, 연필 / <H. 애딩턴 브루스, '사소한 의심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에브리위크" 4호를 위한 삽화>(1917). 종이에 브러시와 잉크, 연필, 불투명 수채. 모두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왼쪽부터) 에드워드 호퍼. <극장 입구>(1906-1910). 종이에 수채, 브러시와 잉크, 연필 / <벽돌공의 휴식>(1907-1910). 종이에 펜과 갈색 잉크, 투명, 불투명 수채, 연필. 모두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 <철길의 석양>(1929). 캔버스에 유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 <자화상>(1925-1930). 캔버스에 유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캔버스에 유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 <와이오밍의 조(Jo in Wyoming)>(1946). 종이에 수채, 연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

"호퍼의 관점은 본질적으로 고전적(classic)이다. 그는 그의 주제들을 어떠한 감정이나 정치적 선전, 혹은 극적인 연출도 없이 제시한다."
- 찰스 버치필드(Charles Burchfield, 1893~1967) [1]

그렇다면, 호퍼는 어떤 작가이며, 그의 작품을 어떻게 봐라봐야 할까? 호퍼는 뉴욕의 일상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사실주의(realism)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유력한 견해는 그에게 영향을 줬던 화풍들과 그의 작풍에 대해 고려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호퍼가 태어나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미국의 미술계는 ‘허드슨 강 파(Hudson River School)’ 풍의 사실주의적 풍경화가 그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반에는 뉴욕의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애쉬캔 화파(Ashcan School)’가 활동하고 있었다. 호퍼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1865~1929) 역시 에이트의 일원으로서 그 방향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호퍼에게 미친 영향은 분명했을 것이며, 이는 호퍼의 초기작들에 활용된 갈색과 회색조의 어두운 색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로버트 헨리는 파리에서 공부하며, 마네(E. Manet, 1832~1883)와 프란스 할스(F. Hals, 1582~1666)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호퍼가 초기에 인상주의 화풍에 매료되었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호퍼가 회화 뿐 아니라 모더니즘 사진 특히, 폴 스트랜드(Paul Strand, 1890~1976)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형식미에 영향을 받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같은 일련의 배경 하에서 호퍼의 그림은 분명 사실적이며 “고전적(classic)”인 형식을 일면 갖는다.

 

로버트 헨리. <뉴욕의 눈>(1902). 캔버스에 유채.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로버트 헨리의 영향이 보이는 어두운 색채와 독특한 구도로 포착된 공간들. (왼쪽부터) 에드워드 호퍼의 세 작품. <나이악 예술가의 침실>(1905-1906). 보드에 유채 /  <파리의 거리>(1906). 나무에 유채 / <파리의 다리>(1906). 나무에 유채. 모두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폴 스트랜드. <월 스트리트>(1915). printed 1976&ndash;1977. Platinum palladium print.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2.

화가의 정신과 표현재료의 육체가 분간할 수 없는 어느 극한의 지점에서부터 현대회화는 잉태했다. (......) 오늘의 회화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형태나 세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이 탐색자들은 ‘측정 불능의 것’ 이것을 그들의 표현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오늘의 예술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데 그 생존의 의의를 넓히고 있다. [2]
- 박서보(1931~ )

그러나 통상적인 사실주의 회화가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에서 분투하고 있다면, 호퍼는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 내면이라는 이차적인 경계를 추가한다. 자신의 회화를 “가장 내밀한 개인적 인상의 전화”[3] 라 정의하는 호퍼는 현실을 내면에서 굴절시킨다. 사실에 심리적 코드를 덧입혀 화폭 위로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호퍼의 그림은 사실이기 보다 ‘구상’이다. 상기한 박서보의 글은 6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에 있었던 일명 ‘구상 대 추상의 논쟁’에서 추상 진영에 있던 박서보가 당대 한국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작가들이 사실과 구상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그의 논지를 거칠게 간추리면, 사실은 대상의 재현에 치중하는 고전적인 방식인 반면, 구상은 추상에 대립하여 등장한 현대의 새로운 조형 이념으로 추상화와 같은 지위에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파울 클레(Paul Klee)의 유명한 정식인 예술은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보이게 한다(non pas rendre le visible, mais rendre visible).”[4] 를 인용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혹은 “‘측정 불능의 것’”을 측정하여 드러내는 구상회화와 단순히 보이는 것, 혹은 “이미 인지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사실회화를 완전히 구분한다. 즉 박서보의 구분에 따르자면, 현실의 사물을 자기 안에서 재단하여 형상으로 옮기는 호퍼의 번역 방식은 일상적 지각에서 파악할 수 없는 당대 뉴욕의 심리적 뉘앙스를 감각한다는 점에서 구상의 방식이다.

 

3. 

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언제나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전(vision)의 일부분이 아닌 다른 방해적인 요소들의 침입을 발견한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내가 기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비전이 필연적으로 폐기되고, 대체됨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 이러한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는 투쟁이 임의의 형태 발명에 덜 관심을 가지는 모든 화가들의 공통점이다. [5]
- 에드워드 호퍼

이제 호퍼의 그림은 사실과 구상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구상과 사실, 그 사이에서 탄생하는 호퍼의 그림은 ‘감각의 형상’에 다름 아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박서보가 인용했던 클레의 정식을 마찬가지로 인용하면서 회화를 ‘보이지 않는 힘’, 즉 ‘감각(sensation)’의 포획이라 규정한다.[6] 들뢰즈에게 감각은 일상적 지각에 내재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발생의 요소로서 지각할 수 없는 것, “측정 불능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여 호퍼의 그림 도식을 표현하자면 ‘그림 = 현실 오브제(사실)---내면의 굴절(감각의 개입)---형상의 창조(구상) = 감각의 형상’ 정도가 될 것이다. 호퍼 역시 자신의 의식에서 벗어난 감각의 개입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비전을 폐기하고 대체하는 “방해적인 요소들의 침입”, 그 요소가 결국 감각의 심급에 해당하는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호퍼 자신은 감각적 요소의 침입을 “부패”라 규정하고 그림의 구도에서 삭제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 호퍼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의지로는 지울 수 없는 감각의 개입을, 그리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것이 ‘감각’이라는 것을. 

 

 

에드워드 호퍼. <오전 7시>(1948). 캔버스에 유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에드워드 호퍼. <뉴욕 실내>(1921). 캔버스에 유채.&nbsp;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 (1933). 「에드워드 호퍼: 고전주의자」. 에드워드 호퍼 회고전의 도록.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6.

[2] 오광수(1998). 『한국 현대미술 비평사』. 서울: 미진사. 135. 재인용.; 박서보(1963.5.29.). 「구상과 사실」. 『동아일보』.

[3] 롤프 귄터 레너. (2005). 『에드워드 호퍼』. 정재곤 옮김. 서울: 마로니에북스. 65. 재인용; Lloyd Goodrich(1971/1983).

      Edward Hopper. New York. 161.

[4] G. Deleuze(1981/2002).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Seuil. 57.

[5] 「회화에 대한 단상」. 위의 도록. 17-18.

[6] G. Deleuze. 위의 책. 57. 참조.

며칠 전 올 한 해가 삼 분의 일이 지났다는 핸드폰의 친절한 알림을 봤다. 어떤 어플에서 알려줬던 것인지, 아니면 핸드폰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기능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친절함 덕분에 나는 또다시 2023년의 첫 5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2016년 군 전역 이후 삶이 갈수록 힘들어져 왔다고 생각했다. 1년, 1년 차곡차곡 성실하게 시간의 선분이 길어질수록 그 끝에 서 있는 나는, 아니 그 첨단에 서 있게 '되어버린' 나는 참 성실하게도 힘들어왔다(지금은 바뀌었지만 20살 때 처음 검사했던 MBTI가 ISTJ였다. 선생님이 나보고 성실한 개미라고 했다. 이런 걸 보면 MBTI가 꽤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당시 나는 성실한 개미를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그리고 '힘듦'의 상승 곡선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하락세가 없으니 곡선이 아니라 직선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올해 첫 5개월은 심신 양면에서 골고루 힘들었다. 개인사의 세세한 항목들을 모두 열거하고 싶지는 않으나 현실과 처음으로 마주했다고 이번 5개월을 정의할 수 있겠다. 이처럼 현실과 더불어 삶이 급박하게 움직였고, 그 안에서 부족함과 무지함을 느꼈고, 새로운 긍정과 희망을 애써 품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일들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이유를 생각해봤다. 무엇이 나를 아무것도 안 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라고 할 때 이 문장의 주어는 숨어있다. 그래서 볼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 하나의 명증한 사실은 저 문장에서 '나'는 수동태라는 것. 나는 무언가에 의해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 5개월, 아니면 비슷한 양상으로 대학원을 수료한 지 3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었던 포인트는 결코 이름할 수 없는 '무언가'에 있는 듯하다. 스피노자(B. Spinoza)의 말대로 존재가 행위하는 힘이라면, 내 존재는 뭔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의해 꽤나 오랫동안 부정 당해 온 것이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이래서 코기토를 말할 수밖에 없었나 싶다). 미지의 무언가에 의한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먼저 규정하고 정의내려야 했다. 그래야 그 범위를 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을 '결과 내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결실을 내지 못하고 방점을 찍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나날들은 게으름으로 치부되었고, 표적에 명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지나온 궤적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논문의 완성, 졸업, 취직, 결혼...... 인생의 단계마다 있는 마침표들이 거대하고 둔중한 솥뚜껑 같은 것이 되어 나의 하늘을 가리고, 내게 보다 강력한 여분의 중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침표가 연속된다면, 마침을 위한 점을 찍고 또 찍어도 끝이 없다면 그게 마침표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침표의 과잉 뒤로 남는 것은 끝없는 결핍의 순환이 아닐까. 내가 점을 찍는다면 마침표가 아니라 '말 줄임표'를 찍고 싶다. 끝없는 말 줄임표의 연속으로 끝마침을 뒤로 미루고 미뤄 결과를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취하고 싶다. 지난 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던(막을 내리는 날짜를 착각하여 결국 가지 못했다...) 김윤신 작가는 '완전한 결론이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술에 완성이란 없다'고 말하면서 '예술은 삶'이라고 말한다.[1] 이는 질 들뢰즈(Gille Deleuze)가 예술을 '완성'이 아닌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삶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과 상통한다. 예술을 빼더라도 삶은 과정이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수동태로서 꽤나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분량을 떠나서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작은 결과를 내는 일이다. 이는 마침표라 할 수 없는 시시한 일이기 때문에 과정 속에 취해지는 점들이라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는 이유가 나와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 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나의 글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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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윤신.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작가 인터뷰 영상. 서울시립미술관. 2023. 

URL: https://www.youtube.com/watch?v=kcldz3pYG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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